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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
鄭 木 日
내가 나무로 태어난다면 참나무가 되고 싶다.
참나무 중에 도토리가 많이 열리는 산속의 상수리나무였으면 한다.
가을이면 온화하고 포근한 갈색 빛의 낙엽을 뿌려 땅을 덮고,
그 속에 되도록 많은 도토리들을 떨어뜨려 놓고 싶다.
산에 갔다가 물기 머금은 산비탈에 미끄러진 일이 있다.
누렇게 변한 참나무 낙엽더미 속에 빠지고 말았다.
간신히 일어나려는데, 엉덩이에 무엇이 박히는 듯 느껴져 살펴보았다.
낙엽 속에 도토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무심결에 도토리 서너 개를 주었다.
도토리는 맵시가 있다. 모자를 단정히 쓴 모습이다.
도토리는 참나무의 열매이다. 참나무는 우리나라 산과 숲에서 가장 많은 나무 중의 한 종(種)이다.
참나무에 속하는 여섯 종류의 나무는 상수리나무·굴참나무·졸참나무·갈참나무·신갈나무·떡갈나무이다.
우리나라 산엔 참나무 숲이 많고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건만,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보긴 처음이다.
어릴 적에 아버지께서 도토리에 성냥개비를 꽂아 팽이를 만들어 주셔서, 갖고 놀던 기억이 난다.
산 속 후미진 곳에서 낙엽에 미끄러져 보니, 숲 바닥이 온통 도토리 세상인 걸 알게 되었다.
눈에 띄지 않은 도토리들이 숲 바닥에 숨어서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다.
참나무 숲 바닥에서 도토리의 말을 들었다.
그 순간, 도토리나무가 되고 싶었다.
화려한 꽃보다도 먹성 좋은 과실보다도 도토리를 주렁주렁 열게 하고 싶었다.
혹독한 겨울이면, 먹을거리가 없는 산속의 짐승과 새들에게 도토리가 되어 말을 하리라.
“걱정마라, 겨울 식량이 돼주마. 너희를 먹여 살리마.”
도토리가 되어 다람쥐, 토끼, 산돼지 등 산 짐승들에게 흔쾌히 식량으로 주고 싶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세상을 살았으니, 내생(來生)엔 산 짐승들의 밥이 된들 어떠랴.
도토리가 없다면 기나긴 겨울동안 산짐승들은 어떻게 추위와 배고픔으로부터 견뎌낼 수 있으랴.
겨울 산속은 바람이 울부짖고 몸은 얼어붙는 듯 춥다. 혹한과 배고픔에 많은 생명체들이 떨고 있다.
참나무가 되어서 도토리를 보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짐승들과 새들에게 구황식품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비를 베풀어주는 도토리가 되고 싶다.
도토리는 눈이 쌓인 산속 짐승들에게 희망의 끈을 잡아준다.
겨울의 시련과 고통을 견디는 힘이 돼준다. 봄이 오기까지 산속의 짐승들을 먹이고 보호해 준다.
도토리들은 참나무의 생명을 싹 피울 씨앗들이다.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다가 대지에서 싹을 피워내야 한다.
도토리는 다른 열매나 마찬가지로 생명의 신비와 존엄을 부여받았다.
참나무는 싹을 피울 도토리만을 맺게 하진 않는다.
겨울 동안 산짐승을 먹일 도토리들까지 결실하도록 하늘의 허락을 받아 놓았다.
도토리 하나씩은 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안다.
산속의 모든 생명체와 닿아 있음을 느낀다. 그냥 참나무 열매만이 아니다.
산짐승의 식량이 되고 생명이 될 수 있게 먹이로 자신을 내놓는다.
어떻게 모든 생명체에게 자양분이 되고 땅을 살찌울 거름이 될 수 있을까.
먹이가 없는 겨울의 산속에 짐승과 새에게 전신공양이 되어 모든 생태계에 순리와 순환을 가져오게 할 것인가.
나는 참나무이고 싶다. 도토리를 사방으로 떨어뜨리고 싶다.
“고맙구나!” 하면서 도토리를 입으로 가져가는 굶주린 짐승들에게 먹거리가 되고 싶다.
도토리는 식량이 귀하던 예전에는 사람들의 구황식품이 돼주기도 했다.
가뭄이나 흉작으로 인해 먹을 것이 귀해졌을 때,
쌀과 보리 등의 주식을 대체하거나 보조할 식품으로 사용되었다.
도토리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쓰고 떫으며 독이 없다고 한다.
장과 위를 든든하게 하여 몸에 살을 오르게 한다고 하였다.
평소에 하찮게 여겼던 도토리!
짐승과 새들에게 전신공양을 바쳐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도토리의 말없는 실천을 생각한다.
오랜 옛적부터 사람들에게 구황식품이 되고,
묵이란 건강식품이 되는 도토리! 도토리의 거룩한 헌신과 생명을 키우는 사랑을 생각한다.
내가 나무로 태어난다면 도토리를 많이 맺는 상수리나무이고 싶다.
도토리를 떨어뜨려 굶주린 새와 산짐승들에게 먹거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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