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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나물의 맛
鄭 木 日
봄의 입맛은 산나물로부터 온다.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보드랍고 순한 새순이 피어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다.
산나물 맛은 순후하다. 맑고 담백하다. 산의 기운과 향기를 풍긴다.
산나물은 산의 만 년 명상의 맛을 지녔다. 하늘의 맑음과 땅의 순박함에서 우러난 맛일까.
나물마다 제각각 다른 미각의 향연은 이른 봄 산촌에서 맛볼 수 있다.
깊은 산속에서 채취한 산나물은 맛이 더 깊고 온후하다. 산나물을 맛보려면 때를 맞추어야 한다.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의 기별을 듣거나,
높은 산이 있는 근방의 오일장에 나가 보아야 제 때의 산나물을 맛볼 수 있다.
봄나물은 약초나 다름없다. 봄에 백 가지 산나물을 먹으면 만병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제일 먼저 눈을 틔우는 홑잎 나물들은 맛이 은근하고,
한 가지에 한 촉씩 나는 두릅나물의 맛은 귀하고 상큼하다.
취나물은 혀끝을 향기롭게 하고 격조가 있다.
제피나물은 속을 따스하게 만들며 자극적이지만 입맛을 동하게 만든다.
삶아낸 머위 잎은 쌉쓰레 하면서 입맛을 돋우고 줄기는 초장에 쌈을 싸먹는다.
줄기는 국을 끓이거나 장아찌를 만들어낸다. 가시오가피나물은 씁쓰레하면서도 깊고 향긋한 맛이 있다.
산나물의 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땅심의 맛이요, 빗방울의 맛, 바람의 맛일지 모른다. 혀를 대면 착하고 순박함을 느낀다.
산나물은 산야초여서 꽃들도 삼삼하고 눈에 잘 띄지 않게 수수하다.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진솔한 모습이다.
소박하나 진실한 맛을 낸다. 더덕은 뿌리만이 아니고 잎도 손색없는 나물이다.
미역초, 개미초, 너들강 바위 틈새에 자라는 다래순을 보면 싱싱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산나물은 산이 내린 선물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이다.
우리 겨레는 산기슭에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다. 삶을 산에 의지한 모습을 보인다.
한국인은 산정기를 타고 태어난다고 믿고, 죽어서 산에 묻히므로 산과는 불가분의 인연을 맺고 있다.
한국인은 외국에 나가 살더라도 산이 있는 곳에 살아야 정서적으로 안정을 얻는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청산(靑山)’이란 이상향(理想鄕)이 있고,
그 곳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산나물과 산(山) 과실이다.
산나물은 임자가 따로 없다. 누구나 채취할 수 있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가공적인 식품이 아니요, 하늘이 내린 천연 생물이어서 천성이 순수하다.
산나물을 데쳐 주물러낼 적에는 조미료를 넣고 고무장갑을 끼어선 안 된다.
집에서 손수 담은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을 넣고 손으로 주물러 내야 제 맛이 난다.
산나물의 맛은 소박한 손맛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땅이 키워낸 나물과 집에서 손수 담은 장(臟)이 어울린 맛이다.
가죽자반은 토종 가죽나무 잎을 따다가 끓는 물에 담구었다 꺼내서 풀을 칠하고 건조시킨다.
다시 찹쌀 풀을 묻힌 후 말린 다음에 기름에 두 번 정도 튀겨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고사리는 볕에 말려서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게 장만해 놓기도 한다.
내가 아는 농촌의 친적 집에 손님이 오면,
안주인은 흰 무명수건을 머리에 쓴 채 손님을 감나무 밑의 평상이나 대청마루에 쉬게 한 다음,
자신은 큰 소쿠리를 들고 텃밭으로 휑하니 달려갔다.
이때부터 안주인은 음식 장만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얼굴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텃밭에서 채소를 뽑고 오이, 가지를 따고 호박잎을 뜯어 마당에 가져와
그 자리에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끓는 국물 냄새와 조물조물 무치는 나물,
나무 타는 냄새와 피어오르는 연기로 집안은 온통 짭조롭한 미각의 환상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농촌의 안주인이야말로 즉석요리의 대가요, 맛의 합주를 연주하는 지휘자임을 느낀다.
이 때 긴요하게 고사리나물과 가죽자반이 나와 인기를 끈다.
금새 남새밭에서 가져온 채소와 나물거리를 데치고 무쳐내 입맛을 돋워준다.
이런 맛의 초대를 지금은 어디서 받을 수 있을까.
인정과 마음이 담긴 정성의 맛이요, 자연이 준 순수한 맛이기에 잊혀지지 않는다.
산나물은 욕심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산의 은총이다.
산을 의지해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산이 가장 선하고 푸짐한 산나물을 주신 모양이다.
반찬이 되고 약초도 되는 산나물은 착한 마음을 갖게 하고, 산처럼 안정감을 갖게 만든다.
만약에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산촌 사람들에게 산나물이 없다면 그 어려움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봄이면 지리산 기슭의 마을에 가서 봄 경치를 구경하면서 산나물 맛을 본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산나물들이 반지르르 새 빛을 내는 모습과 향기를 맡으며 깨어나는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싶다.
산나물 맛은 그냥 한 음식의 미각이 아니다. 산의 높고 담담한 묵상의 맛, 고요의 맛이 깃들어 있다.
한 없이 착하고 후덕한 마음의 향기가 담겨 있다. 근심 걱정을 잊게 하는 맛의 미소가 있다.
(2010. 계간 <동리 목월>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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