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배경(背景)
정목일(鄭木日) 수필가
달 밝은 밤에 들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달빛이 너무나 눈부시어
혼자 서성거리고만 있어 본 적은 없는가.
이런 달밤엔 무엇을 하면 좋을까.
가슴 설레며 님과 만날 때도 달밤이 좋겠고,
님과 이별해야 할 일이 벌어져도, 이런 달밤이었으면 좋겠다.
어찌 별리이겠는가.
달빛의 고요를 밟고서 님을 만나고,
별리의 슬픔을 나누더라도 달밤이면 잘 잊히지 않고
다시 맑은 그리움으로 떠오르지 않겠는가.
비가 오는 날엔 잊었던 얼굴이 떠오르고, 다정한 말이 귓가에 스며온다.
어느새 눈동자를 살포시 가린 속눈썹이 얼굴에 닿아오는 듯하다.
이런 날엔 문득 수첩을 뒤져보고, 전화를 하고 싶어진다.
빗소리는 잔잔히 속삭이는 음성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기 때문일까.
눈이 내리는 날엔 그냥 집으로 가고 싶지 않다.
친구와 만나 술이라도 한 잔 나누고 싶어진다.
눈이 내리는 광경을 그냥 보고 지나치기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어릴 적 추억이 등불을 켜고, 손을 호호 불며
눈싸움울 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눈가에 아른거린다.
저물녘 노을을 보면, 피리를 꺼내 불고 싶다.
노을은 누구의 삶을 마지막으로 채색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점점 사라져 이내 어둠에 묻히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고 허전해진다.
그래서 였을 것이다. 그 일이 벌어진 것은, 순전히 노을 때문이었다.
새 천년 여름, 나는 금강산기행을 떠났다.
평생에 한 번 금강산에 가볼 수 있을까 여겼던
여행을 실제로 하게 된 것이었다.
여행 도중 장전항에 내려 금강산 만물상을 보고
배로 돌아오기 위해 세관을 통과한 직후였다.
바깥으로 장전항이 보이고 금강산 줄기의 굽이치는 능선 위에
까치놀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고 금강산의 까치놀을 촬영했다.
황홀한 순간이었다. 카메라 셔터소리가 나자,
주변에 있는 관광객들이 놀라며 나를 쳐다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현깃증이 일었다.
감시중이던 북한 군인이 달려왔다. 카메라와 신분증을 압수했다.
장전항에선 촬영이 금지돼 있다는 주의사항을 듣고도
순간적으로 망각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규정을 위반하여 적발 당하고 보니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다음 날 구룡폭포코스를 답사하였지만 촬영을 할 수 없어서
그저 마음 속에 절경의 모습을 담아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출항하는 날 저녁, 군(軍) 감시소의 호출을 받았다.
군인 집무실에 혼자 들어간다는 것이 두렵고 찜찜했다.
군인 십여명이 일제히 주시하고 있었다.
장전항에선 촬영이 금지돼 있다는 걸 사전에 교육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교육을 받았다고 순순히 답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촬영했는가?』라는 추궁에, 나는 대답했다.
『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금강산 노을에 빠져, 배경의 아름다움에 취해
군사시설, 이데올러기, 금지와 같은 말을 망각해 버렸던 것이다.
금강산 답사코스의 마지막 정상인 「나뭇꾼과 선녀」의 전설이 전해오는
가파른 「상팔담」에서 칠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이 노인은 하얀 모시 두루마기 차림에다 흰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등산 차림엔 어울리지 않았지만, 참으로 우아한 모습이었다.
넌즛이 옷차림에 대해 여쭤 보았다.
노인은 죽기 전에 금강산 구경이 소원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족의 영산이며 세계 제일의 절경인 금강산을 오르는데
옷차림을 허술하게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금상산의 기막힌 절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노인의 모습이
신선이나 학처럼 비춰졌다.
가끔씩 자신이 걸어왔던 삶의 배경을 생각해볼 일이다.
자신의 등 뒤에 부모형제와 벗들이
어떤 모습의 배경이 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아름다운 배경이란 무심결에 자신에게 찾아오는 게 아니다.
자신의 선업(善業)이 쌓여서 은은한 빛깔과 향기가 되고,
삶의 배경이 되는 것이리라.
깨달음과 자비의 빛인 부처의 광배(光背)처럼.
내 삶의 배경이 아름다워지길 원한다면
먼저 이웃들의 삶에 아름다운 배경이 돼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를 위해서 아름다운 배경이 돼보았는가.
아끼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꺼이 비가 되고, 눈이 되고, 노을이 되는 것이다.
그저 잠깐 동안 배경이 되어 사라진다해도 좋지 않은가.
건강한 사람은 병든 자를 위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우둔한 사람을 위하여,
지식자는 무식자를 위하여, 부자는 빈자를 위하여,
권력자는 무력자를 위하여 말없는 배경이 돼줘야 함에도,
오히려 짓밟으며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불우한 이웃을 돕고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어려운 일을 앞장서서 해내고도 뒤에서 미소만 짓는 사람을 보고 싶다.
아름다운 배경을 만들려면, 자신이 아름다워지지 않으면 안된다.
배경은 결국 자신의 삶이내는 광채이며 향기가 아닐까.
나의 배경색은 어떤 빛깔이며, 배경 음악은 어떤 것일까.
사랑, 헌신, 착함이 깊어질수록 삶의 배경색과 배경음악도 아름다워지리라.
우리는 아름다운 배경으로 살다가 숨을 거두고 싶어한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순 없을까.
고요한 달빛처럼, 촉촉한 비처럼, 순결한 눈처럼, 짜릿한 노을처럼…….
낭송출처- 鄭木日<마음꽃피우기>오디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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